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성산성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6세기]]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장수왕]] 시대부터 시작된 남하 정책을 방어하기 위해 [[나제동맹]]을 맺어둔 상태에서, 두 나라의 가운데에 있는 [[가야]] 소국들을 두고 서로 파워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고구려라는 강적 때문에 가야 쪽으로 대대적인 군사 동원은 서로 자제하고 있었지만 백제와 신라의 가야를 둔 쟁탈전은 이미 6세기 초반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먼저 가야를 공격한 것은 백제였다. 백제는 512년에서 513년에 거쳐, 모루국(순천), 사타국(광양), 상다리(여수), 하다리(돌산), 상기문(임실), 하기문(남원), 대사국(하동) 등 전라도 일대의 가야를 멸망시켰다. 이후 백제는 내륙의 가야를 고립시켜 복속을 시도했고 이에 위기를 느낀 [[대가야]]는 백제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의 우호 관계를 추진했다. 522년 3월 대가야의 왕 이뇌왕는 신라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 혼인 동맹을 청했고 이에 가야 지역으로 영향력 확대를 노린 신라에서는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대가야에 보내 혼인동맹이 맺어졌다. 대가야와 더불어 유력한 가야 세력이었던 아라가야(안라국)은 529년 백제와 신라에 중립을 선언했다. 이에 백제 성왕은 아라가야를 공격하여 걸탁성을 빼았았다. 신라는 백제가 소백산맥 이서(전라도) 가야를 먹는 것까지는 방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529년 백제가 소백산맥을 넘어와 내륙의 아라가야까지 공격하자 신라도 더이상 가만히 있지 않았다. 신라는 529년 [[탁기탄]](양산)을 시작으로 532년 [[금관가야]](김해)을 병합하였고, 538년 [[탁순국]](창원)을 병합했다. 남은 가야의 소국들은 멸망을 피하기 위해 신라에 교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한편 백제는 가야 소국의 군주들을 두 차례 사비성을 불러모아 [[사비회의]]를 열었지만 끝내 결렬되었다. 남은 가야 소국들 중 비교적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아라가야]](안라국)[* 후기가야 22국 중 주도권이 있던 가야는 북부의 대가야, 서남부의 소가야, 중부의 아라가야, 동부의 금관국-탁순국으로 4곳 정도였다. 그런데 백제가 서부 7국을 멸망시키면서 소가야가 힘을 잃었다. 대가야는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었지만 결국 영향력을 상실했다. 금관가야-탁순국이 신라에 멸망한 540년대 정세에서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가야는 아라가야가 사실상 유일했다.]는 백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왜국에게까지 도움을 청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호응한 고구려군이 고구려에 속국화된 [[동예]]인들을 대거 동원해서 백제의 북방을 공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